저는 마이크 타이슨의 경기는 몇번 보아서 알고 있습니다.
특히 복귀전에서 귀를 물어 뜯는 경기... 그 경기 이전에 워낙 복귀전이 흥행을 해서 타이슨의 전성기 때의 경기를 TV에서 잠깐씩 보여줬기 때문입니다.
아래의 상편이 아닌 하편의 기사부터 봤습니다. 타이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겠죠..
타이슨이 알리처럼 은퇴이후에도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을 합니다.
그래도 타이슨의 경기는 정말 대단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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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上편에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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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과 외로움에 폭력으로 얼룩진 타이슨의 10대
"나는 불쌍한 검둥이 꼬마였어. 누구도 나를 돌봐주지 않았고 나 역시 아무도 신경쓰지 않았어. 그곳은 가장 터프하고 가장 못된 놈만 살아남는 곳이야. 살기위해서는 버텨야 했고 최대한 나빠야 했지"
마이크 타이슨은 1966년 뉴욕의 빈민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버지의 존재를 몰랐고 그의 모친은 종교적 맹신에 빠져 아들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항상 지저분한 옷을 입고 꾀죄죄한 몰골로 돌아다니던 그를 사람들은 '더티 타이슨'이라고 놀렸다. 그는 도둑질에 능숙했던 몇 살 위의 동네 형들을 존경했고 꼬마시절부터 빈집과 문을 닫은 가게를 따고 들어가기 시작했다. "내 형제 자매들은 훔치는 것을 거부했고 구걸을 했어. 그 때는 그것이 너무 창피했지. 하지만 사실은 그들이 정직했던 거야" 모친의 남자친구는 모친과 타이슨을 심하게 두들겨 패는 버릇이 있었다. 어렸을 때부터 타이슨은 폭력의 공포에 지배당했다. 그리고 그의 신체가 성장하면서 폭력으로 타인을 지배하는 습성을 가지게 된다. 10대 초반부터 그의 싸움실력은 또래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 타이슨은 강도로 성장해 있었다. "멀쩡한 사람이 길 저편에서 우리를 보게 되면 당장 경계를 하게 되지. 우리는 그의 경계심을 풀기위해 연기를 하면서 그에게 접근했어. 그를 속여 안심하게 만든 후 갑자기 달려들어 두드려 패고 짓밟아서 의식을 잃게 만들어 지갑과 시계를 빼앗는 것이 작업의 정석이었어" 이런 이야기도 있다. "열 세살(한국나이로 14~15세) 무렵에는 무장강도로 가게들을 털고 다녔어. 그게 내가 가장 좋아했던 것이었지. 나는 그것을 매일, 하루에도 몇 번씩 하고 싶었지만 친구들이 겁이 많아 성에 찰 정도로 못했던 기억이 나는군" 이 시기의 타이슨은 벌써 38회의 체포 경력을 자랑(?)하는 범죄계의 준재로 성장 중이었다. 유치장과 보호시설에서도 그는 누구를 반쯤 죽여 놓는 일이 다반사였고 상대방이 휘두른 흉기에 당하는 일도 잦았다. 공격을 가했을 때의 죄책감도 당했을 때의 억울함도 그는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들이 그의 삶에서는 당연한 것이었다. 복싱에서 인생의 친구를 만나다 1980년 뉴욕의 캣스킬이라는 지역의 한 청소년 보호시설에 수감된 타이슨은 복싱짐을 최초로 방문하게 된다. 그 곳에는 아마추어 챔피언 출신의 바비 스튜어트가 문제적 소년들에게 복싱을 통한 선도 교육을 행하고 있었다. 타이슨은 벽에 걸린 스튜어트의 사진을 보고 "저 사람이 강하냐?"고 물었다. 한 수련생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자 타이슨은 "내가 더 셀 것 같은데?"라고 도발을 걸었고 이 말을 전해들은 스튜어트는 타이슨을 링 위로 불러들였다. 복싱을 해 본적이 없던 타이슨이었지만 그의 초인적인 운동능력은 스튜어트를 곤란하게 만들 정도였고 이에 깊은 인상을 받은 스튜어트는 자신이 알고 있는 최고의 지도자였던 커스 다마토에게 즉각적으로 연락을 취했다. 1908년생의 커스 다마토는 이탈리아계 미국인이다. 20대 초반부터 복싱 트레이너 일을 해온 그는 피커부(Peek-a-boo: 두 손을 얼굴 앞으로 모은 하이가드에 다리의 좌우 폭을 상대적으로 넓게 가져가며 정면을 보는 복싱자세)스타일의 창시자다. 다마토는 플로이드 페터슨(헤비급)과 호세 토레스(라이트 헤비급)를 세계챔피언을 키워냈고, 당시에는 사실상 은퇴 상태로 테디 아틀라스(현 ESPN 복싱의 간판 해설자, 김지훈의 팬이다)라든지 케빈 루니같은 트레이너들을 키우고 있었으며 소일거리 삼아 동네의 불량소년들에게 복싱을 통한 선도를 베풀고 있던 중이었다. 타이슨을 대면한 다마토는 자신의 집으로 타이슨을 데리고 갔다. "'늙은 백인 영감이 나를 노예처럼 부려먹으려고 데려가는구나. 거기서 청소나 하고 쓰레기나 주워 먹게 되겠지. 하지만 두고 봐라. 기회만 오면 바로 도망칠거다'라고 생각하면서 다마토를 따라갔어. 하지만 그는 나를 가족으로 대해주었어. 그리고 그 특이한 백노인은 나보고 역사상 최고의 복싱선수가 될 거니 뭐니 하면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들을 늘어놓더군" 테디 아틀라스에 의하면 타이슨을 만난 다마토는 매우 기뻐했다고 한다. 다마토는 다시 젊어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고 목적의식이 다시 불타오르게 되었다. 하지만 다마토에게 남겨진 시간을 길지 않았다. 둘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1980년이었고 1908년생의 다마토는 이미 72세였다. 따라서 다마토는 서두를 수밖에 없었고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오직 타이슨의 조련에 모든 것을 걸었다. "그는 과거의 나를 모조리 박살내버렸고 나를 리폼시켰어. 그는 나를 심판하지 않은 유일한 백인이었지. 그가 나를 부수고 새로운 나로 만들어가던 과정에서 나는 그에게서 깊은 의리를 느꼈고 그에게 완전히 충성하게 되었어. 거의 인간적인 백인 주인을 모시는 노예 같았지. 그가 나의 아버지였으면 했다고" 다마토는 단신의 타이슨에게 조 루이스와 플로이드 페터슨의 영상을 보여주면서 그의 접근전과 인사이드 펀칭을 가르쳤다. 상대의 공격을 상체움직임으로 재끼면서 달라붙은 후 상대의 품속에서 핵탄두를 날리는 방식이었다. 그의 성장은 무서운 속도로 이루어졌다. 하나를 가르치기가 무섭게 다음 것을 요구하는 그를 두고 코칭 스테프의 모든 이가 '천재'라고 입을 모았다. 하지만 육체적인 능력에 비해 그의 정신력에는 큰 결함이 있었다. 처음으로 출전하는 경기에서 그는 심한 공포감을 느꼈고 그것을 이기지 못해 아틀라스를 붙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나는 거리에서 총을 꺼내들고 강도짓을 하던 놈이었지만 복싱은 겁이 났지. 복싱은 강도짓과는 달랐어. 상대가 비쩍 마른 백인 학생이었더라도 복싱은 규칙이 있는, 그리고 통제력을 요구하는 스포츠였거든. 강도짓보다 복싱이 더 무서운거야" 아마추어 무대에 선을 보인 타이슨은 첫 토너먼트의 결승에서 경기시작 8초 만에 KO승을 거뒀다. 아마추어 경기의 최단시간 KO승이었다. 타이슨의 펀치는 헤드기어를 뚫고 충격을 전달하는 진품이었다. 다마토의 열정에 의해 타이슨의 행실은 다소 나아진 바 있지만 그래도 타이슨은 타이슨이었다. 학교에서는 계속 문제를 일으켰고 아마추어 복싱 관계자들은 타이슨을 경원하게 된다. 그리고 타이슨은 1985년 3월, 만 18세의 나이에 프로로 데뷔했다. 마이크 타이슨 데뷔전 1985년 11월 1일까지, 8개월 동안 타이슨은 무려 11연승(11KO)의 경력을 쌓았다. 거의 25일에 한번 꼴로 링에 오른 셈이고 그 중 8경기가 1회 KO승이었으며 2회 KO승, 3회 KO승, 4회 KO승이 각각 한 번씩 있었다. 피커부 자세를 취하고 무서운 속도로 상체를 흔들며 달려드는 타이슨에게 상대의 공격은 통하지 않았다. 그리고 타이슨의 왼손이든 오른손이든 하나만 걸리면 경기는 그대로 끝났던 것이다. 2경기 트렌트 싱글턴戰 4경기 리카르도 스페인戰 7경기 로렌조 카네디戰 8경기 마이클 존슨戰 9경기 도니 롱戰 10경기 로버트 콜레이戰 11경기 스털링 벤자민戰 1985년 11월 4일 커스 다마토가 향년 79세로 귀천했다. 그는 타이슨에게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그는 타이슨을 인간적으로 대해준 최초의 사람이었다. 이 당시 타이슨은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커스는 가셨지만 저는 그의 유지를 받들어 프로페셔널로서 계속 싸울 것입니다. 다마토가 원하던 결과(헤비급 챔피언이 되는것)는 이루어집니다" 다마토가 떠나고 난 이후 타이슨이 믿고 의지할 만한 사람은 짐 제이콥스가 유일했다. 그는 다마토와 타이슨의 재정 관리인이었다. 타이슨은 그를 멘토로 생각했다. 고지식하고 냉정했던 이탈리아계 다마토에 비해 제이콥스는 따뜻한 성격의 신뢰할 수 있는 흑인이었던 것이다. 다마토-제이콥스-루니-타이슨은 '캣스킬 커넥션'이라고 불릴 정도로 강한 결속력을 자랑했다. 하지만 다마토가 떠난 후 프로모터 돈 킹은 타이슨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기 위한 움직임을 서서히 개시했다. 85년 11월 13일부터 86년 9월까지 약 10개월 동안 타이슨은 무려 16경기를 소화했다. 거의 19일에 한 번씩 링에 오른 셈이다. 86년 5월 9일의 제임스 틸스戰과 5월 20일의 미치 그린戰에서의 10라운드 판정승을 제외하면 모두 KO승이었다. 1회 KO승은 7번이었다. 특기할만한 부분은 제임스 틸스戰에서 10라운드 경기를 치른지 불과 11일 만에 다음 상대인 미치 그린과 싸웠다는 점, 그린전에서의 10라운드 판정승 이후 23일 만에 다시 링에 올랐다는 대목이다. 차베즈 같은 경량급의 멕시칸 파이터가 아닌 헤비급 선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페이스로 경기를 치렀던 셈이다. 당시 타이슨의 전적은 27연승(25KO)이었다. 그 중 1회 KO승만 무려 15회에 달했다. '철인(The iron)'이라는 별명에 걸맞은 무시무시한 행보였다. 86년 11월 22일 타이슨은 트레버 버빅을 상대로 WBC 헤비급 타이틀에 도전했다. 챔피언이 링에 서 있을 수 있었던 시간은 5분이 한계였다. 2라운드 TKO승으로 벨트를 손에 넣은 타이슨은 사상 최연소의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돈 킹은 이 경기 직후 타이슨을 위한 대관식을 연다. 기본적으로는 요즘 유행한다는 코스프레 같은 행사였지만 미디어의 환심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타이슨vs.버빅 다음경기는 WBA 챔피언 제임스 스미스와의 통합타이틀전이었다. 스미스는 타이슨을 상대로 점도 높은 복슬링을 걸어왔고 이 경기는 판정까지 가게 된다. 이것을 두고 상대방이 타이슨에 대한 연구를 잘 해서 나온 결과라고 이야기하지만, 개인적으로는 타이슨의 경기력은 이시기부터 서서히 감퇴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하는 견해를 가지고 있다. 결과는 어찌되었건 타이슨의 승리였다. 87년 1월 자신의 30번째 경기에서 핑클론 토머스를 꺾고 IBF 타이틀마저 손에 넣은 타이슨은 헤비급 3대기구 통합을 성공시켰고 체급 내에서 유일무이한 챔피언이 되었다. 88년에는 한때 48승을 달리며 록키 마르시아노의 기록에 도전했었던 노장 복서이며 알리의 복사판이라는 별명을 가졌던 래리 홈즈를 4회에 잠재웠고, 같은 해 5월 래리 홈즈의 연승기록을 48승에서 저지했던 마이클 스핑크스 역시 타이슨의 1회 KO승의 제물이 되었다. 당시의 헤비급은 그것으로 사실상 평정된 것으로 봐도 좋을 것이다. 이 당시 타이슨의 인기는 세계적으로 상상을 초월했다. 스핑크스戰 같은 경우는 국내의 각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쉬쉬하며 학생들과 같이 보았을 정도였다(필자의 학교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에서도 이런 현상이 많이 일어났던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타이슨은 당시 한 경기에서 22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이 당시 메이저리그 최고 선수의 1년 연봉이 약 800만 달러였다. 이 비율대로 타이슨의 파이트머니를 지금의 가치로 환산해보면 거의 1억 달러(알렉스 로드리게스의 연봉 3300만 달러의 약 세배)에 달하는 엄청난 액수다. 이러한 천문학적인 수익이 발생하면서 타이슨의 주변은 복잡해진다. 특히 88년 3월 짐 제이콥스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캣스킬 커넥션은 사실상 와해상태에 이르렀다. 제이콥스의 사후 빌 케이튼이 뒤를 이었다. 이 상황 직전에 타이슨은 로빈 기븐스와 결혼을 한 상태였다. 기본스와 케이튼은 서로 앙숙이 된다. 재정문제에 대해 케이튼과 기본스는 자신의 재량권을 주장하며 심하게 다투는 경우가 잦았다. 미디어도 타이슨을 그냥 두지 않았다. 언론은 타이슨의 모든 것을 캐내려 했고 특히 타이슨의 정신적 문제점(조울증 의혹, 폭력적 성향)에 대해 마구잡이로 보도하기 시작하며 타이슨을 흔들었다. 이 당시 타이슨이 느꼈던 심리적 압박감은 엄청났다고 한다. 사실상의 아버지인 다마토와 정신적 지주이자 유일한 친구(서구적 개념)인 제이콥스를 불과 3년 사이에 잃고 주체할 수 없을 만큼의 돈을 놓고 부인과 재정관리자는 아귀다툼을 벌였으며 언론은 도무지 입을 다물 생각을 하지 않고 시끄럽게 떠들어 대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이콥스가 죽고 난 이후 나에게 친구라고 할 만한 사람은 단 한명도 없었어. 주변에 있는 모두가 돈에 환장한 인간들이었지" 그리고 돈 킹이 전면으로 나서게 된다. 킹은 선수의 심리적 약점, 혹은 어두운 욕망을 이용해 지배력을 행사하는 마귀 같은 프로모터로 유명했다. 비참한 빈곤 속에서 성장했고 10대 후반에 보수적이며 엄격한 다마토의 조련을 받았던 타이슨은 여자와 향락에 유난히 약했다. 킹은 미녀들과 파티를 동원해 타이슨의 환심을 샀다. 이러한 타이슨의 외도에 지친 기본스는 타이슨과 이혼을 감행했다. 기본스에 대해 애초에 결혼을 통해 크게 한몫 뜯어내기 위해 타이슨에게 접근한 교활한 여자라는 의견도 파다했다. 이혼 직후 킹은 타이슨에게 "이제야 자유로운 몸이 되었군"이라고 말했다. 킹의 손아귀에 떨어진 타이슨의 방탕한 생활은 극단을 향해 달려갔다. 그리고 타이슨의 경기력은 빠른 속도로 저하되기 시작한다. 그의 발은 느려지기 시작했고 상체움직임도 다마토 생전에 비해 날카로움이 줄어들었다. 1990년 일본에서 타이슨은 버스터 더글러스에게 충격적인 KO패를 당했다. 이 경기에 대해 타이슨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아무런 준비를 하지 않았어. 일본 여자들과 밤새도록 뒹굴었어. 그리고 버스터가 내 엉덩이를 신나게 걷어찼지" 이후의 이야기는 이미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타이슨은 강간혐의로 기소된 후 옥살이를 했으며 복귀한 이후 홀리필드와 레녹스 루이스에게 험한 꼴을 당했다. 하지만 90년대의 타이슨은 타이슨과 비슷하게 생긴 전혀 다른 선수였다. 개인적으로는 86년까지의 타이슨이 진짜라고 생각한다. 이후의 타이슨은 비슷하게 생긴 전혀 다른 복서로 퇴화했다.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다. 세상의 유혹은 그만큼 강대했던 것이며 복서의 길은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변이 너무나 복잡했고 타이슨의 성격에 약간의 문제가 있었기에 이런 결과가 나오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또한 다마토와 제이콥스가 더도 말고 5년만 더 생존해 있었다면 타이슨-홀리필드戰은 96년이 아닌 90년, 혹은 91년에 벌어졌을 것이고 결과는 달랐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후반기의 타이슨은 그야말로 참혹한 결과를 남기고 쓸쓸하게 은퇴했다. 파산을 당하는 등 여러 고통 속에서 허우적대던 그였지만 최근에는 굉장히 좋아진 모습이다.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참회의 눈물을 흘렸고 홀리필드와 화해했으며 행오버 라는 영화에 출연해 코믹한 장면을 연기하기도 했다. 무엇보다도 진정한 배필을 만나서 아이들을 기르며 정상적인 가장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 복싱팬들에게는 일종의 선물이 되진 않았을까 생각한다. 영화 '행 오버' 中 마이크 타이슨 출연 장면 아웃복싱의 달인vs근접전 최강자 무하마드 알리에 대해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모아 말하는 한 가지가 있다. 그는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예술의 경지로 끌고 간 인물이라는 것이다. 단지 두 명의 사나운 남자들이 서로를 박살내기 위해 피를 철철 흘리며 죽도록 치고받는 그런 게임이 아니라 관객들을 무아지경으로 이끄는 '아름다운' 마력을 선보인 것이 바로 알리의 복싱이라는 것이다. 부드럽고 유연하며 속도감이 극에 달한 발놀림과 상대의 공격을 불과 몇 센티 차이로 흘려내는 상체움직임 및 헤드워크, 그리고 팔랑거리는 듯하지만 임팩트 순간에는 막강한 파괴력을 전달하는 주먹솜씨가 일체를 이루어 나타났던 것이 바로 알리의 게임이다. 이것을 말로 설명하기보다는 다음 소개하는 한 경기를 주목해 보면 간단하다. 바로 알리가 투옥되기 얼마 전 치렀던 클리블랜드 윌리엄즈戰이다. 알리-윌리엄즈 '춤추는 사신' 알리의 경기력 상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의 유지다. 그는 빠른 발을 전후 좌우로 움직여 상대에게 거리와 앵글을 주지 않으면서 본인이 원하는 지점에서 공격을 한다. 그리고 상대의 공격이 들어오면 그것을 막거나 흘리면서 받아친다. 펀칭의 강도보다는 거리유지와 카운터 타이밍을 최소화 하는데 주력하고 있으며 장거리를 달리며 점수를 쌓아올려 상대를 좌절시키는 방식을 선호했다. 그렇지만 피냄새를 맡으면 그 누구보다도 강력한 펀치러시를 걸고 상대를 그 자리에서 꺾어버리는 능력도 대단한 선수였다. 투옥 이전까지의 알리는 사실상 결점을 찾기 힘들 정도로 완성도 높은 아웃 복서였다. 알리의 이 스타일은 슈거 레이 로빈슨이 제창한 왼쪽으로 돌며 왼손을 활용하는 방식의 완성형 버전이었으며 슈거레이 레너드에게 전해졌다. 이것은 복싱이라는 스포츠에서 가장 효과적인 시스템으로 알려져 있지만, 스피드가 매우 뛰어나고 반사신경과 정교한 핸드-아이 코오디 네이션, 그리고 체격조건이 받쳐주지 못한다면 완성시킬 수 없는 그런 궁극적인 스타일이다. 난투극을 원하는 팬들에게 이런 스타일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복싱 전문가들과 저널리스트들 중 대부분은 알리 이래 이런 유형의 선수들에게 후한 점수를 주는 것이 관례처럼 되었다. 반면 타이슨의 스타일은 알리와 같은 아웃복싱을 잡기위해 만들어진 방식이다. 쏟아지는 잽과 스트레이트, 그리고 계속 벌어지는 거리와 자꾸 틀어지는 앵글이라는 문제를 플로이드 페터슨, 조 프레이저, 마이크 타이슨은 대략 유사한 방법으로 풀어갔다. 끊임없는 보빙(더킹과 위빙이 합쳐진 형태의 헤드워크)으로 상대의 펀치를 흘리고 상대가 좌우 움직임으로 앵글전환을 시도하면 상대의 발 바깥쪽으로 발을 디디는 스텝(링커트)으로 그것을 봉쇄, 빠른 전진 스텝으로 인사이드로 파고 든 후 보디와 머리를 넘나드는 양 훅을 동원해 상대를 내파시키는 전법, 그것이 바로 스와밍의 요체다. 커스 다마토는 플로이드 페터슨과 타이슨을 챔피언으로 키워냈는데, 이 지도자의 철학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키가 크고 도망을 다니는 상대를 작고 재빠른 녀석이 �아가 달라붙어 박살내는 것만큼 신나는 것은 없지. 자신보다 큰 녀석을 때려눕히지 못한다면 복싱을 배워서 뭘 하겠나?" 타이슨은 그야말로 폭발적인, 거의 맹수를 연상시키는 움직임을 가진 선수였다. 그의 상체움직임은 상대의 펀치를 여유있게 흘려보냈고 그의 스텝이 발생시키는 압력에서 탈출 할 수 있었던 선수는 사실상 없었다. 그리고 그 펀칭의 속도와 위력은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수준이었다. 타이슨은 아웃복서를 잡기위해 특별히 만들어진 전략병기였다. 제대로 된 스와밍을 구사하기 위해서는 스피드와 민첩성, 파워와 맷집, 그리고 과감성과 배짱 등이 필요하다. 스와머의 조건을 완벽히 갖췄던 복서가 바로 타이슨이었다. 타이슨 KO 퍼레이드 타이슨 디펜시브 무브 하이라이트 이런 능력치는 '알리에게 타이슨이라면 한번 해 볼만 하지 않았겠는가'하는 의견이 탄생하는 배경이 됐다. 복싱 마니아들 사이에서는 그런 얘기가 있다. 타이슨은 포먼과 붙었으면 힘들었겠지만 오히려 포먼을 이긴 알리와는 해 볼만 하다는 것. 초반의 타이슨과 중후반의 알리 '결과는?' 넓은 링이라면 알리가 유리하고 좁은 링이면 타이슨이 풀어가기가 수월하다. 15라운드 경기면 알리, 12라운드면 호각일 것이다. 타이슨의 폭발력은 중반까지가 한계다. 후반까지 진행된 경기에서 타이슨은 좀처럼 KO승을 거두지 못했다. 알리는 맷집과 정신력이 극도로 뛰어난 선수이며 몸이 굉장히 유연했기 때문에 상대의 펀치력을 어느 정도 무효화시키는 특수한 체질을 가지고 있었다. 타이슨 역시 상대의 펀치를 초인적인 움직임으로 흘리면서 접근전을 거는 특수능력을 보유했다. 경기 초반은 지뢰밭이다. 아무리 타이슨이라고 해도 알리의 스텝과 정교한 펀칭을 극복하고 접근할 수 있었을까? 반대로 아무리 알리라고 해도 타이슨의 야수적인 움직임과 강력한 파괴력을 콘트롤 할 수 있었을까? 이것은 정말 아무리 생각을 해도 어떤 의견을 내기조차 힘들만큼 난해한 부분이다. 때문에 경기 초반은 백중세라는 것 외에는 예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6라운드 이후부터는 아마도 알리의 영역이 될 것이다. 타이슨의 속도저하에 비해 알리는 굉장히 오랫 동안 풀스피드로 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선수로서의 완성도에 근본적인 차이는 분명히 있다. 알리는 어린 시절 복싱을 시작했고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출신인 반면 타이슨의 경우 늦은 나이에 시작해 아마추어 경력도 짧고 다마토의 조련을 받은 것도 약 5년 정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복싱을 시작한 것이 80년이고 86년 만 19세의 나이에 챔피언이 되었다. 천재, 천재 하는데 타이슨이야 말로 진짜배기 천재였다). '전반적으로 운영에 능한 알리가 약간 유리하지 않나'라는 생각이 들지만 자신은 없다. 그렇지만 '만약 타이슨이 좀 더 일찍 발굴되었고 다마토가 몇 년만 더 살았다면' 하는 가정을 붙인다면, 즉 타이슨이 알리만큼 경력을 쌓은 상태로 만난다면 그것은 진짜 모른다는 의견을 덧붙이고 싶다. 역사에 만약이란 없다지만, 타이슨이라는 존재는 자꾸 가정을 부르게 될 만큼 짙은 아쉬움을 남긴 선수였기 때문이다. 이용수 칼럼니스트 yongsu24@hanmail.net [믿을 수 있는 격투기 뉴스, 신세기 격투스포츠의 길라잡이 엠파이트 (www.mfigh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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