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세 컨텐츠

본문 제목

[퍼옴][BOF칼럼] 알리vs타이슨, 중량급 역사상 최강복서는?(上)

나의생각

by 야솔아빠 2012. 6. 12. 11:09

본문

반응형

http://sports.media.daum.net/general/news/moresports/breaking/view.html?cateid=1076&newsid=20120608185305907&p=mfight


원본글입니다.

나중에 사라질까봐서 복사를 합니다.


조저포먼과 무하마드 알리의 경기를 흐릿하게나마 볼수 있어서 너무 좋았습니다.

알리가 이렇게 위대한 사람인지 몰랐습니다.

정말 대단하네요...


간간히 유트브 동영상도 링크되어 있으니 보시기 바랍니다.

특히 조지포먼의 경기를 보셔야 포먼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이였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 포먼을 33세의 알리가 이겼다라는 것도 대단합니다.


---------------------------------------------------------------------------------------------------------

ESPN의 '11 FT'라는 대담프로그램에서 ESPN 소속의 스포츠 저널리스트 롭 파커와 스킵 베일리스는 격한 논쟁을 벌였다. 주제는 바로 '전성기의 알리와 전성기의 타이슨이 대전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겠느냐'였다. 40대인 파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타이슨의 커리어를 전체적으로 보면 버스터 더글러스에게 패한 이후의 후반부는 확실히 엉망이죠. 하지만 그 이전에 그가 상대한 모두를 박살내던 모습을 떠올려 봅시다. 당시 타이슨의 상대가 알리가 맞붙었던 선수들에 비해 인지도가 낮은 것은 사실이지만 그때는 그들이 전부였어요. 타이슨은 그들 모두와 싸웠고 대부분의 경기에서 압도적인 파워를 선보이며 초반에 경기를 마무리 지었습니다. 그리고 알리가 약점을 보였던 선수가 누구였죠? 바로 조 프레이져와 켄 노튼이었습니다. 타이슨은 누구를 연상시킵니까? 프레이져입니다. 저는 타이슨의 모든 경기를 아직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어요. 프랭크 부르노 같은 거대한 근육질의 선수가 타이슨전을 앞두고 벌벌 떨고 있었어요" 


이 주장을 듣던 60대 베일리스는 다음과 같이 대응했다. 


"이런 논쟁에 참여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부끄럽네요. 하지만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없겠군요. 제 생각에 이 논쟁은 말도 안 됩니다. 타이슨은 3라운드도 버티지 못할 겁니다. 먼저 신장과 리치차를 생각해 봅시다. 타이슨은 5피트 9인치에 가까운 5피트 10인치죠. 알리는 꽉찬 6피트 3인치입니다. 리치차도 거의 10인치 차이가 납니다. 그리고 전성기, 전성기 하시는데, 알리가 소니 리스튼을 상대하던 시절을 돌아 봐요. 리스튼은 커다란 곰 같은 선수였습니다. 알리는 그를 두 번씩이나 KO시켰죠. 프레이져에게 비록 한번 지기는 했지만 이후 두 경기에서 프레이져를 눌렀습니다. 그리고 조지 포먼은 비록 지금 바비큐 장비를 팔러다니고 있습니다만 당시에는 그냥 괴물이었지요. 알리가 자이르에서 이룩한 바를 생각해 보십시오" 


무하마드 알리와 마이크 타이슨 중 누가 강했을까. 이것은 영원히 결론에 도달하지 못할 입씨름거리다. 이것에 대한 잡설을 늘어놓는 것은 사실 매우 부질없는 짓일 것이다. 하지만 미국을 비롯한 전 세계의 올드 복싱팬들은 아직도 이 주제를 놓지 못하고 있는 게 사실이다. 


대략 60대에 가까우신 분들 중 상당수는 위에서 소개한 베일리스의 입장을 견지하는 편이다. 알리라는 인물은 감히 타이슨에 비견할 만큼 쉬운 선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40대와 그 이하의 팬들사이에서는 가장 좋았을 때의 타이슨이라면 알리와 한번 해 볼만했다는 의견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왜냐 하면 타이슨의 기량저하는 그의 진정한 보호자이자 스승인 커스 다마토의 사후 통제력을 상실하고 트레이닝을 게을리 하면서 발생한 것이라는 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다마토의 아우라가 타이슨의 봉인으로 작용하고 있을 당시, 그리고 타이슨이 다마토의 영전에 벨트를 바치겠다는 의지가 남아있을 때, 그 때의 타이슨이 진짜 타이슨이다. 이 시기의 타이슨은 역사상 그 짝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위험한 복서였다. 이후의 그는 그냥 키가 작고 펀치력만 강한 보통의 선수로 전락하고 만다. 후반기의 타이슨을 기준으로 타이슨의 전체를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나비처럼 날아 벌처럼 쏜' 흑인들의 영웅 무하마드 알리 

무하마드 알리(본명: 캐시어스 클레이)는 2차대전이 한창이던 1942년에 태어났다. 어린 시절 자신의 자전거를 훔쳐 달아나던 아이를 쫓아가 붙잡고 두들겨 패던 그를 한 경찰관이 발견했다. 마틴이라는 이름을 가졌던 그 경찰관은 클레이를 프레디 스토너라는 복싱코치에게 맡겨 선도를 부탁한다. 알리의 재능은 순식간에 꽃을 피웠고 아마추어 무대에서 100승 5패를 거두며 골든 글러브를 석권한 후 올림픽 금메달도 목에 걸었다. 그는 미국을 대표해 싸웠고 최선의 결과를 가지고 자신의 고향인 루이빌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가 식사를 하러 루이빌의 한 식당을 방문했을 때 식당의 주인은 알리가 흑인이라는 이유로 접객을 거절하고 쫓아냈다. 알리는 올림픽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던져버렸다. 


1960년 10월 29일, 알리는 역사적인 프로 데뷔전을 가졌다. 6라운드 경기에서 상대를 완벽하게 포장한 그는 손쉬운 판정승으로 첫 단추를 완벽하게 채웠다. 1963년까지 알리는 15KO승을 포함한 19연승을 달렸다. 


1964년 당시 헤비급 챔피언은 소니 리스튼이었다. 그는 한때 무장강도질을 저질렀고 복싱을 통해 새사람이 되었다. 리스튼은 터프했고 양손에 막강한 화력을 보유한 강타자였다. 링 지가 선정한 100대 파워펀처 리스트에도 이름을 올리고 있는 그는 플로이드 페터슨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으면서 1962년에 헤비급 챔피언이 되었다. 그의 1차 방어전은 패터슨과의 재전이었고 결과는 1차전과 마찬가지로 리스튼의 1라운드 KO승이었다. 리스튼의 2차 방어전 상대로 22세의 알리가 지명된다. 


'나비처럼 날아서 벌처럼 쏘겠다'는 발언은 이 경기 직전의 인터뷰에서 나왔다. 알리는 경기에서 빠른 발과 날카로운 잽 그리고 묵직한 스트레이트로 리스튼을 유린했고 한쪽 눈이 완전히 감긴 챔피언은 6라운드가 끝나고 경기를 포기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을 사용하던 알리는 경기 직후 무슬림(이슬람) 저항단체인 '네이션 오브 이슬람'의 일원임을 밝히며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다. 알리는 이렇게 흑인 인권운동의 중심에 서게 된 것이다. 


이듬해였던 1965년 5월 알리와 리스튼은 리턴매치를 벌인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두 선수의 격차는 더 크게 벌어져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알리는 터프하기로 이름난 전챔피언을 1라운드 2분여 만에 침몰시켰다. 


소니 리스튼이 레프트를 내면서 접근할 때 알리는 뒷발을 빼면서 스웨이 동작을 취한 후 라이트 뻗어치기를 카운터로 적중시켰다. 그렇지만 경기장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알리의 초고속 라이트가 적중되는 것을 보지 못했고 리스튼이 도대체 무엇을 먹고 떨어졌는지를 궁금해 했다. 그래서 이 경기에서 나온 알리의 결정타에는 '팬톰 펀치'라는 별명이 붙게 된다. 


팬톰 펀치 슬로모션 영상 

1965년 11월부터 1967년 3월까지 알리는 6KO가 포함된 8연승을 달렸다. 총 전적은 29승(23KO)이 되었다. 


1964년 미 공군은 알리에 대해 읽기와 쓰기 능력이 부족해 군 복무에 적합하지 않다는 판단을 내린 바 있다. 하지만 1966년 미 공군은 알리에게 입대 영장을 발부했다. 월남의 전황이 긴박하게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 1967년 알리는 군 입대를 거부했다. 종교적, 의식적 병역 거부였다. 종교관에 반하는 전쟁에 참여하고 싶지 않았던 알리는 다음과 같은 이유들을 내세웠다. 


"나는 베트콩과 아무런 문제가 없다. 어떤 베트콩도 나를 검둥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나는 백인들이 유색인종의 땅을 불태우고 그들을 죽여 지배력을 강화시키는데 힘을 보태고 싶지 않다. 지금은 백인들의 사악한 불의를 종식시켜야 할 때다" 


"제 고향 루이빌에서는 아직도 흑인들이 개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제가 왜 만마일이나 떨어진 그 곳까지 날아가 또 다른 유색인종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들을 죽여야 한단 말입니까?" 


알리의 이런 발언은 미국을 거대한 논쟁 속으로 밀어넣게 된다. 미국인의 일부는 이런 알리의 입장을 놓고 극단적인 성토와 악감정을 표출했으며 다른 한편은 알리를 반전운동의 상징으로 떠받들었다. 


알리는 병역 거부에 대한 재판에서 유죄가 선고되었다. 알리에게는 징역 5년형이 떨어졌고 복싱 라이센스도 박탈됐다. 알리는 무죄를 주장하며 대법원에 항소했다. '네이션 오브 무슬림'의 리더 엘리야 무하마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알리를 조직에서 제명시켰다. 알리의 주변에서 영광의 단물을 즐기던 주변인들도 하나둘씩 그의 곁을 떠났다. 


알리의 정치적 동지이자 흑인 인권운동측의 과격파였던 말컴 X에 이어 68년 전미 흑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온건파 저항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도 극우파 백인 청년의 저격에 당해 목숨을 잃었다. 70년에는 반전과 평화의 상징이었던 우드스탁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였던 흑인 기타리스트 지미 핸드릭스가 마약 과다 복용에 의한 죽음을 맞았다. 그의 죽음에 대해 암살이었다는 주장을 펴는 사람들도 많다. 당시 미국 흑인사회의 절망감은 대단했다. 


여전히 항소심이 진행 중이었던 1970년, 알리가 링으로 복귀했다. 10월 26일 알리는 제리 쿼리와 대전했다. 쿼리는 당시까지 37승 5패 4무를 기록하고 있던 중견 헤비급 복서였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알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잭 댐시나 조 프레이저를 조련했던 전문가들마저도 이것은 어렵다고 말하는 것을 압니다. 제가 아무리 뛰어난 복서였을 지라도 3년 6개월의 공백을 메우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그들은 생각하고 있죠. 오늘 저는 단지 쿼리를 꺽는 것만이 아니라 소위 전문가들이라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것 역시 증명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제 컨디션과 스피드, 반사능력에 깜짝 놀라게 될 것입니다" 


자신만만해 하던 알리는 1회부터 쿼리를 일방적으로 두들겼다. 쿼리의 안면은 순식간에 엉망이 되고 피로 물들었다. 3라운드가 끝닸을 때 링닥터는 경기의 속행이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3라운드 종료 TKO승으로 알리는 화려하게 복귀했다. 


다음경기에서 오스카 보나베나를 라스트 라운드의 KO로 때려잡은 알리는 드디어 타이틀 도전권을 확보했다. 챔피언은 조 프레이저였다. 프레이저는 27연승(24KO)을 거두고 있던 초신성으로 알리가 물러나자마자 헤비급의 양대기구를 석권했다. 그는 단신이었지만 엄청난 압력으로 상대를 몰아붙이고 강력한 레프트훅을 상대의 품속에서 터뜨리는 '스와머' 스타일로 유명했다. 그는 마이크 타이슨의 프로토타입이었다. 


The fight of the Century, 1971년 8월 3일 열렸던 이 경기의 부제는 바로 '세기의 대결' 이었다. 그야말로 10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한 '메가 파이트'였던 것이다. 대회장은 복싱의 '聖地' 메디슨 스퀘어 가든이었다. 


조 프레이저 vs. 무하마드 알리 1차전 하이라이트 

두 명의 불사신이 서로의 신성을 파괴하기 위해 야만적으로 격돌했던 이 15라운드의 대혈전은 경기를 라이브로 보지 못했던 세대로써는 강한 질투심이 생길만큼 엄청났다. 알리의 잽과 스트레이트는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프레이저는 소나기 사이를 뚫고 알리의 인사이드로 파고들어가 강력한 보디블로와 레프트훅을 계속 적중시켰다. 아무리 봐도 중반을 넘어서기 힘들 듯했던 이 극단적인 살의의 교환극은 라스트라운드의 공이 울릴 때까지 계속되었다. 


프레이저는 15라운드에 다운을 빼앗았고 알리를 빈사직전까지 몰아세웠다. 그것으로 프레이저는 알리의 도전을 전원일치 판정승으로 물리치고 타이틀을 수성하게 된다. 프레이저는 알리에게 최초의 1패를 선사했다. 알리는 이 경기에서 자신이 그저 빠르기만 한 선수가 아니라 강한턱과 불굴의 정신을 가진 진정한 파이터임을 증명했다. 이것은 두 선수가 모두 승자인 그런 대 경기였다. 


1973년 4차방어를 성공시킨 조 프레이저의 앞에 조지 포먼이 나타났다. 193cm의 신장에 208cm의 리치와 거대한 체격을 가졌던 포먼은 당시 37연승(34KO)을 기록하고 있던 초현실적인 KO머신이었다. 이 당시 포먼은 무려 22연속 KO승을 거두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경기를 초반에 마무리 하는 괴력을 자랑했다. 이 경기는 무패에 90%를 넘나드는 KO율을 자랑하던 양대 KO킹이 격돌한 '왕중왕전'이었다. 


조 프레이저 vs. 조지 포먼 1차전 영상 

이 경기에서 자세히 봐야 할 부분은 포먼이 구사하는 푸시와 롤이다. 포먼은 프레이저가 달라붙으려고 하면 양손으로 어깨 근처를 강하게 밀어낸다. 그리고 프레이저가 왼손을 내려하면 왼쪽 언더훅과 오른쪽 오버훅을 이용해 빙글 돌려버린다. 이것은 현재의 복싱에서는 감점사항이다. 하지만 이 당시는 문제가 되지 않았고 포먼은 이런 레슬링적인 기교를 차용해 자신의 체격과 힘의 포텐셜을 극대화 시키고 있었다. 


또한 포먼은 프레이저가 보빙(위빙과 더킹이 합쳐진 움직임으로 머리를 원운동시키는 동작)을 걸면서 달라붙을 때 알리처럼 방어를 굳히며 거리를 벌이려는 움직임을 취하기보다는 그 자리에서 라이트 어퍼컷을 올렸다. 이 경기에서는 프레이저는 특유의 압력을 행사하지 못했고 포먼의 화력 앞에 약점을 노출한 채 2라운드까지 무려 6회의 다운을 기록한 끝에 스톱 당하게 된다. 


포먼의 등장은 세계 헤비급의 아포칼립스였다. 프레이저의 양대기구 타이틀을 손에 넣은 포먼은 1차 방어전에서 푸에르토 리코 출신의 호세 로만을 1라운드 KO승으로 간단하게 손봤다. 포먼의 2차방어전 상대는 캔 노튼이었다. 그는 1973년 3월에 알리와 대전해 알리에게 생애 두 번째의 검은 별을 선물한 뛰어난 선수였다. 73년 9월에 있었던 알리와의 2차전에서는 비록 판정패를 당했지만 두 경기 모두 스플릿 디시전의 판정이었고 캔 노튼은 당시 알리와 거의 대등한 능력을 가진 복서로 인정받고 있었다. 


조지 포먼 vs. 캔 노튼 영상 

정면을 그대로 상대에게 노출한 프론트 페이스(반대의 개념은 옆으로 틀어선 사이드 페이스, 프론트 페이스가 공격적인 태세)의 포먼은 방어와 수비적 기동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으며 상대를 거세게 몰아붙였다. 왼팔을 벨트라인 근처로 늘어뜨리고 낮은 자세를 취한 노튼은 포먼의 빈틈을 노리며 거리유지에 힘을 썼다. 노튼의 테크닉이 확실히 한 수 위였다. 포먼은 1라운드 내내 큰 스윙의 훅을 연이어 미스한다. 노튼은 오히려 포먼의 강타사이에 카운터를 수차례 찔러 넣었다. 


1라운드가 끝나고 링사이드에 있던 알리에게 중계진의 마이크가 넘어갔다. 알리는 '포먼의 공격이 거칠고 적중률이 떨어지기 때문에 노튼이 경기를 계속 테크니컬하게 끌고 가면 포먼의 체력이 금방 바닥날 것'이라고 예견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 노튼은 포먼의 라이트 어퍼컷을 먹게 되고 그것으로 경기의 99%는 결정되어버렸다. 노튼은 안간힘을 쓰며 회복을 시도하지만 포먼의 라이트는 계속 적중되었고 두 번의 다운을 더 기록한 끝에 포먼의 TKO승이 선언된다. 


프레이저와 알리의 경기를 보면 두 선수가 강력한 클린히트를 서로 주고받으며 15라운드까지 달렸다. 알리와 노튼도 두 경기에 걸쳐 30라운드 내내 팽팽하게 대치했다. 그러나 프레이저와 노튼 둘 모두 포먼을 상대로는 겨우 2라운드만에 처참하게 분쇄되었다. 포먼의 라이트는 단 한발만 꽂히면 그대로 승부가 결정되는 궁극의 파워펀치였다. 포먼은 당시 3년 8개월 동안 8경기 연속으로 2회 이내에 KO승을 거두고 있었다. 상대들은 모두 상위랭커와 전 챔피언이었다. 


이것으로 포먼의 전적은 40연승(37KO)이 된다. KO율은 무려 92.5%였다. 총 전적 49연승(43KO)을 기록한 록키 마르시아노의 KO율이 약 88%였다. 포먼이 앞으로 록키의 모든 기록을 갱신할 것을 의심하는 복싱인은 드물었다. 


알리가 그 포먼에게 도전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웃었다. 이 당시 33세(포먼 26세)였던 알리는 더 이상 전성기도 아니고 전성기의 알리가 돌아와도 포먼에게는 안 될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었다. 


알리는 이 경기를 흑인들의 고향인 아프리카에서 치르기로 결심했다. 자이르의 수도 킨샤샤는 알리의 도래를 맞아 어마어마한 환영의 물결이 일어나고 미국 내의 흑인들 역시 알리의 이러한 선택에 커다란 감명을 받게 된다. 


알리는 자이르에서 아프리카어로 '알리 붐바예'라는 구호를 만들었고 선거유세에나 동원될법한 오픈탑 차량을 타고 온 동네를 다니며 그것을 외쳤다. 동네의 어린아이부터 나무그늘에 앉아 시간을 죽이던 노인까지 이것을 따라했다. 이 구호의 의미는 '알리, (포먼을)죽여버려!'라는 뜻이었다. 


알리는 특유의 입심으로 포먼의 귀를 공격했다. 차마 입에 담기도 힘들만큼 가혹한 언어의 연속기 앞에서 포먼은 점점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것은 바로 알리가 원한 바였다. 


1974년 10월 30일, 알리와 포먼은 드디어 역사적인 대면을 가졌다. 상당수의 전문가들과 안목이 있다는 팬들의 입장에서 이것은 단지 '알리 최후의 날'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 경기의 결과는 모든 이의 상상을 초월했다. 이 경기의 부제는 '정글에서의 대회전(Rumble in the Jungle)'이었다. 


조지 포먼 vs. 무하마드 알리 전체경기 영상 

조지 포먼 vs. 무하마드 알리 하이라이트 

이날 경기장에는 약 7만명의 관객이 들어찼다. 조 프레이저는 해설석에 앉아 있었다. 알리가 등장할 때부터 해설진은 이것이 알리의 은퇴전이 될 것인지에 대해 언급했다. 이 경기에서 이기지 못하면 은퇴하는 편이 낫다는 뉘앙스였다. 알리의 코너에는 안젤로 던디가 버티고 있었다. 해설진은 코너의 실력만큼은 알리 쪽이 우세하다고 말했다. 


알리는 이 경기에서 한 변의 길이가 20피트인 링을 원했다. 하지만 에버라스트 社(복싱기어 제조사의 대표격)는 19피트의 링을 제공했다(링 사이즈가 크면 복서타입이 유리하고 작으면 파이터가 유리하다. 경기에 어떤 링이 사용되는지를 보면 해당 선수들의 비즈니스가 얼마나 좋은지를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 포먼은 18피트 링을 원했기 때문에 이 19피트 링은 공정한 타협이었다고 보여진다. 경기에는 8온스 글러브가 사용됐다. 


알리가 링에 오른 지 8분에 가깝도록 포먼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해설진은 이에 대해 불만을 표출했다. 하지만 이것은 여러 스포츠에서 흔히 일어나는 신경전이다. 상대를 약 올리는 방법치고 이만한 것도 없다. 


포먼이 링 위로 올라오자 알리는 포먼에게 계속 말을 걸었다. 뭐라고 하는지는 잘 안 들리지만 돌처럼 굳은 포먼의 표정을 보면 그다지 듣기에 유쾌한 소리는 아니었을 것을 알 수 있다. 


조 프레이저는 해설진이 경기에 대한 예상을 해달라고 요청하자 "아마 1라운드와 15라운드 사이에 승부가 결정나겠죠. 챔피언이 다소 우세하다고 봅니다"라고 말했다. 


이 경기가 마지막 라운드까지 갈 것 같냐는 질문에는 잘 모르겠다는 대답을 했다. 그리고 과연 알리에게 기회가 있기는 하겠냐는 질문을 받는다. 질문자는 알리에게 전혀 찬스가 없다고 말했지만, 프레이저는 "모든 사람은 두개의 주먹을 가지고 있으며 어느 쪽이든 기회는 있다"고 대답했다. 


40전 전승(37KO)의 전적을 가진 포먼은 220파운드로 기록됐다. 알리의 전적은 당시 44승(31KO) 2패였고 경기당일 체중은 216파운드였다. 스테어다운이 끝나고 자신의 코너에서 알리는 이슬람식 기도를 올렸다. 그리고 잠시 후 공이 울렸다. 최근 4년간 9경기를 치르며 2라운드를 넘겨본 적이 없는 괴물 챔피언과 전성기를 지나고 남은 것은 언변밖에 없다는 평가를 받던 알리가 드디어 격돌하게 된 것이다. 


알리는 거리를 유지하면서 장거리포를 쏘려 했지만 포먼의 링커트(상대를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발놀림)에 의해 자꾸만 코너와 로프로 몰렸다. 포먼이 거리를 좁혀오면 알리는 클린치를 잡으며 포먼의 압력에서 탈출했다. 그리고 간간히 라이트 단발과 원투를 포먼의 안면에 꽃아 넣었다. 특히 로프에 몰려 있다가 갑자기 튕겨 나오며 던지는 라이트 단발이 효과적으로 먹혀들어간다. 포먼은 로프사이드로 알리를 밀어붙이고 좌우 훅을 쏟아내지만 알리는 로프의 탄성을 이용해 상체를 뒤로 넘기면서 포먼의 공격을 흘려버린다. 이것이 바로 알리의 독문절기 '로프 어 도프(The Rope-a-Dope)'였다. 


'링위에는 숨을 장소도 도망칠 공간도 없다'는 금언이 있다. 알리는 그러나 이날 그것을 넘어섰다. 그는 링 위에 숨겨진 공간을 발견했고 그 지점에서 사상 최강의 파워펀처를 상대했다. 포먼은 로프사이드에서 알리의 안면을 공격하는 것에 어려움을 느끼게 된다. 그러나 포먼의 바디펀치는 알리의 복부에 계속 타격을 중첩시켰다. 알리는 포먼의 머리를 집요하게 노렸다. 경기는 알리의 복부가 먼저 거덜나느냐, 아니면 포먼의 의식이 먼저 끊어지느냐의 구도로 흘러갔다. 


라운드가 거듭될수록 포먼은 지쳐갔다. 큰 궤적의 풀스윙을 마구 날리는 그의 습성이 문제였다. 알리는 서서히 경기의 주도권을 장악해 나갔다. 5라운드가 되자 포먼은 눈에 띄게 느려졌고 답답해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5라운드의 중반에는 알리의 라이트가 크게 적중되었다. 


5라운드가 끝났을 때 캐스터는 알리가 왜 코너에 박혀서 경기를 끌고 나가는지에 대해 의문스러워했다. 프레이저는 이것에 대해 "알리는 지금 로프를 이용한 전법을 사용하고 있는 것 같으며 포먼은 여기에 말려들었다"고 말했다. 이 당시 이것은 처음 보는 방식이었고 프레이저 정도의 복서가 아니라면 해설자라고 해도 이를 파악하는 것은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해설진은 프레이저의 말을 무시한 채 계속 알리의 이러한 행동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한다. 그리고 해설자는 조금만 기다리면 결국 포먼의 강타가 불을 뿜을 것이라 믿고 있었다. 알리의 코너에 있던 안젤로 던디 역시 알리의 이러한 행동에 불만을 표현하고 있었다. 


운명의 8라운드, 시작부터 포먼은 알리를 로프로 몰고 갔다. 하지만 알리는 '로프 어 도프'를 구사해 포먼의 헤드샷을 무위로 돌렸다. 물러나면서 톡톡 던지는 알리의 잽은 계속 적중되었다. 라운드 종료를 약 1분 남긴 시점에서 포먼은 알리를 로프에 몰아넣고 대공세를 취했다. 포먼의 일방적인 공격은 40여초동안 계속 되었다. 라운드 종료를 20여초 남긴 시점에서 클린치에 대한 심판의 브레이크 선언이 떨어졌고 여전한 기세로 밀고 들어오던 포먼의 안면에 알리의 라이트가 살짝 얹혔다. 그리고 잠시 후 또 하나의 라이트가 포먼의 머리를 타격했다. 알리는 아마 그 시점에서 피 냄새를 맡은 것으로 보인다. 로프를 빠져나와 링 중앙으로 움직이며 알리는 강력한 양손연타를 포먼의 안면에 꽃아 넣었다. 마지막 라이트를 정통으로 받은 포먼은 그대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는 카운트가 다 할때 까지 일어나지 못했다. 알리의 8라운드 KO승이었다. 이것이 바로 '킨샤샤의 기적'이라고 후대에 전해진 알리-포먼전의 전말이다. 


알리는 이 경기에서 승리하면서 신적인 추앙을 받게 된다. 포먼은 이후 6경기를 더 치르지만 다시는 알리에게 도전할 기회를 잡지 못했고 77년 지미 영에게 판정패 한 후 10년 동안 링을 등지고 만다(10년 후의 컴백에서 포먼은 다시 한 번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알리는 그 후로도 아주 오랜 기간 수많은 강자들과 싸웠다. 그는 56승(37KO) 5패의 전적을 남겼고 헤비급을 세 번 정복한 최초의 선수가 되었다. 


1975년 3월 24일 한 가난했던 무명배우가 자신의 주머니를 털어 무하마드 알리와 척 웨프너의 경기를 관전했다. 웨프너는 적어도 몇 수는 위였던 알리를 맞이해 투혼의 파이팅을 선보였다. 그리고 그는 15라운드에 장렬하게 산화했다. 


무명배우는 이 경기에서 거대한 영감을 얻었다. 그는 이후의 3일 내내 시나리오의 집필에 몰두했다. 그리고 탄생한 영화가 바로 '록키'였다. 그 무명배우의 이름이 실베스터 스탤론이었다. 록키에서 '아폴로 크리드'가 바로 알리를 모델로 완성된 캐릭터였다. 


스탤론은 이 영화를 통해 오스카 주연상과 각본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수상은 실패). 스탤론은 이후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발돋움 했다. 


알리가 은퇴를 발표하자 알리의 고향 루이빌에는 '무하마드 알리 불러바드'라는 도로가 생겼다. 당시에는 약간의 논란이 있었다고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잠잠해 졌다. 


1984년 알리는 파킨슨씨병의 진단을 받았다. 일명 '펀치 드링크'라는 증상으로 알리의 경우는 상당히 심각한 케이스였다. 그는 거동에 큰 불편을 느끼게 되었으며 더 이상 말을 잘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세상은 그러나 알리를 더욱 사랑하게 된다. 모든 것을 불태워 사람들에게 감명을 준 위대한 스포츠맨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1987년 알리는 미국 헌법 자문위원으로 추대된다. 이는 최고위의 사법케이스에서 위헌의 소지가 있는지를 판정하는 직위라고 한다. 1991년 알리는 이라크를 향했다. 그는 후세인을 직접 만나 이라크전(1차) 종전 후 인질교환의 협상을 벌였다. 후세인은 알리의 열렬한 팬이었다. 


1996년 애틀란타 올림픽의 성화봉송에서 알리는 마지막 주자로 나섰고 직접 성화대에 점화를 했다. 이 장면은 전세계로 중계되었다. 1998년 링지는 모든 세기를 망라한 최고의 헤비급 복서로 알리를 지목했다. 1999년 영국의 BBC 방송은 알리를 20세기를 대표하는 스포츠맨으로 선정했다. 다른 후보들이 얻은 득표를 모두 합쳐도 알리가 획득한 수치를 넘어서지 못했다. 


2001년 명장 마이클 만 감독은 알리의 전기 영화를 기획했다. 감독은 알리역으로 윌 스미스를 원했지만 스미스는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하지만 알리가 직접 나서서 스미스를 설득했다. 알리는 스미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봐, 자네는 내 역할을 거의 맡겨도 될 만큼 잘생겼다고". 스미스는 알리와의 대면이후 출연제의를 받아들였고 오스카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다. 


2002년 알리는 UN의 평화특사로 아프가니스탄을 방문했다. 그리고 2005년에는 조지 부시는 알리에게 프레지던셜 시티즌 메달(영도적 시민장)을 수여했다. 


같은 해 알리는 자신의 19번째 결혼 기념을 맞이했고 자신의 고향 루이빌에 마하마드 알리 센터를 선물했다. 6천만불짜리였던 이 건물은 비영리의 목적으로 통제가 힘든 청소년들의 선도와 그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2007년 알리의 이름을 딴 장미의 신품종이 개발되었다. 이것의 이름은 'Rosa Ali'라고 한다. 그리고 2008년 버락 오바마가 미국의 44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다음 편에서는 타이슨의 일대기와 두 선수의 가상대결에 대해 다뤄집니다. 

이용수 칼럼니스트 

yongsu24@hanmail.net 

[믿을 수 있는 격투기 뉴스, 신세기 격투스포츠의 길라잡이 엠파이트 (www.mfight.co.kr)] 

반응형

관련글 더보기

댓글 영역